[1~2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 작성자
- 노유리
- 등록일
- 2020년 02월 26일 16시 31분
- 조회수
-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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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수님 저번 질문의 답변에 이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성찰공부가 선한 정은 보존하고 악한 정은 제거하는 공부라면 악한 정과 선한 정의 구별은 곧 나의 마음이 리와 일치가 되어야 그것의 구분이 가능하고 이에 따라 더 잘 제거할 수 있으므로 격물치지가 이발의 공부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또한 지공부 행공부를 모두 포함하는 공부라고 하셨는데 행공부를 잘 하기 위한 지공부의 기초가 되는 공부 아닐까요? 왜 행공부에도 해당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함양공부도 지공부 행공부 둘다 해당되나요?
2. 이황의 리자도에 대하여 질문 있습니다.
기존의 주희의 격물치지는 사사물물에 내재해있는 리를 발견하여 그로 인해 자신의 마음의 앎(본성)이 확대되는 것이라면
이황의 입장은 마음이 자신 마음의 리인 본성 자체를 궁구하면 그에 따라 마음에 자신의 리가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사물물에 내재해 있는 리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없다고 보는 건가요? 리자도의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 관련하여 질문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개념을 이야기할때 주로 지적인 탁월성보다는 품성의 탁월성만 이야기하나요...? (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하면 품성적 탁월성을 이야기하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요) 교재 P.65 소크라테스의 지덕일치설 비판에서 품성의 탁월성 부분만 나와있어서 질문드려요!
4. 품성의 탁월성이 감정과 행위 선택에 있어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있도록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왜 올바른 목표를 욕구하는 건가요? 자연적인 성향을 이겨내고 중용에 따라서 선택하려는 것이 결국 올바른 목표를 욕구하려는 힘이어서 그런가요?
그럼 중용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품성의 탁월성을 기르기 위해 덕 있는 행위를 반복학습 하여 습관화해야하고 중용의 선택을 더 잘하기 위해 실천적 지혜 즉 교육이 필요한거죠?
5. 이황과 주희의 도심인심이 같고 이이는 다르다고 하셨는데 주희랑 이이의 도심인심설이 잘 구분이 안됩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각대상이 리 도의 성명을 지각할때 도심이 된고
마음의 지각대상이 형기에서 비롯하는 사사로운 욕구를 지각할때 인심이 됩니다
이이는 마음의 의욕작용이 도의 성명을 위해 발할때 도심이 되고
마음의 의욕작용이 구체 식색과 같은 형기에서 비롯하는 사사로운 욕망일때 인심이 됩니다
지각대상과 의욕작용의 대상의 차이로 밖에 생각이 안되는데... 지각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결국에 리를 근원으로 할지 기를 근원으로 할지에 대한 것인가요..???
그럼 의욕작용은 근원은 리와 기의 근원 없이 마음 하나 인건가요?
6. 칠정은 인심과 도심의 선악을 합하여 말한 것이라고 했는데 도심에는 악이 없는거 아닌가요?
도심과 칠정의 선악을 말하는 것일까요...?
7. 교재 p.527 첫번째 지문에 셋째는 용을 평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결국에 용을 평상시에 해야할 것으로 여긴다는거 아닌가요?? 용이란건 선을 지속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 의지인데 이것을 왜 평상시에 해야할것으로 여기는게 왜 오늘날 성인이 되고자 해도 그럴 수 없는 이유인건가요?
8. 정약용의 관점에서 주자의 신독과 정약용의 신독과 다른 점은
주자의 신독은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말로 이것은 다른 일과 타인과 아무도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모를꺼야라는 마음이 될 수 있으므로 적절히 실행될 수 없지만
정약용의 신독은 홀로 있을때 삼가는 것은 항상 상제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까지 감시하므로 인식하기에 자기 반성에 더욱더 효과적이라는 것인가요...? 둘의 차이점 잘 이해가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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