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0년 03월 03일 21시 26분
- 조회수
- 639
- 첨부파일
-
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이발성찰 공부는 천리를 인식하여 선과 악을 아는 공부인 지 공부(격물치지)와 발한 정의 선악을 알아 선정이면 보존하고 악정이며 제거하는 행 공부(성의, 정심)를 모두 포함하는 공부입니다.
2. 리자도의 격물설에서 이황이 말하고자 한 것의 핵심은 인식 주체인 마음이 사물의 리를 탐구하는 대로 사물의 리가 인식 주체인 마음에 자신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인식 주체인 마음의 입장에서 말하면 마음이 사물의 리를 드러낸 것이겠지만, 인식 대상인 사물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것에 내재한 리가 스스로 마음에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 리자도의 격물설의 핵심 주장입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탁월성과 품성의 탁월성 모두 중요하게 다룹니다.
4. 품성의 탁월성은 욕구하는 부분의 탁월성이고, 욕구하는 부분의 기능은 감정과 행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구하는 부분이 탁월성을 소유하게 되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르게 욕구하고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여기서 올바르게 욕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항상 좋음(선)을 이루고자 욕구한다는 말입니다.
품성의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의 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의하면, 품성의 탁월성은덕 있는 행위의 반복적인 실천과 이성의 계발하여 실천적 지혜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통해 형성됩니다.
5. 주희는 도심을 도의를 지각하는 마음으로, 인심은 형기에서 비롯되는 사사로운 욕구를 지각하는 마음으로 정의합니다. 이처럼 주희에게 있어서 도심과 인심의 구분은 마음의 지각 작용의 대상과 지각 내용에 따른 구분입니다. 이와는 달리 이이는 마음의 의욕 작용의 성격을 기준으로 도심과 인심을 구분합니다. 즉, 이이에 의하면, 정이 도의를 위해 발한 것이 도심이고 정이 구체를 위해 발한 것이 인심입니다. 이렇듯 이이는 도심과 인심의 형성에 있어서 마음의 의욕 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도심과 인심을 이루는 마음의 능동적 작용력,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의지에 따른 변화 가능성을 크게 강조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6. 네. 도심에는 악이 없습니다. 칠정은 인심과 도심의 선악을 합하여 말한 것이라 할 때, 악은 인심의 악을 말한 것이 도심의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7. 주희는 중용의 용을 평상(平常)으로 해석하는데, 여기서 평상이란 정확히 평상의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정약용은 용을 오래도록 노력하는 주체의 끈질긴 실천 의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보고, 그것을 평상이 아니라 ‘항상(恒常)’으로 해석합니다.
8. 정약용은 신독을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상제의 명령을 듣고 두려워하며, 상제의 명령에 따라 삼가고 자신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신독을 주자처럼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일에 삼가기를 다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 [노유리 회원님의 글] ▒▒▒▒▒▒
1. 교수님 저번 질문의 답변에 이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성찰공부가 선한 정은 보존하고 악한 정은 제거하는 공부라면 악한 정과 선한 정의 구별은 곧 나의 마음이 리와 일치가 되어야 그것의 구분이 가능하고 이에 따라 더 잘 제거할 수 있으므로 격물치지가 이발의 공부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또한 지공부 행공부를 모두 포함하는 공부라고 하셨는데 행공부를 잘 하기 위한 지공부의 기초가 되는 공부 아닐까요? 왜 행공부에도 해당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함양공부도 지공부 행공부 둘다 해당되나요?
2. 이황의 리자도에 대하여 질문 있습니다.
기존의 주희의 격물치지는 사사물물에 내재해있는 리를 발견하여 그로 인해 자신의 마음의 앎(본성)이 확대되는 것이라면
이황의 입장은 마음이 자신 마음의 리인 본성 자체를 궁구하면 그에 따라 마음에 자신의 리가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사물물에 내재해 있는 리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없다고 보는 건가요? 리자도의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 관련하여 질문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개념을 이야기할때 주로 지적인 탁월성보다는 품성의 탁월성만 이야기하나요...? (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하면 품성적 탁월성을 이야기하는 느낌이 자꾸 들어서요) 교재 P.65 소크라테스의 지덕일치설 비판에서 품성의 탁월성 부분만 나와있어서 질문드려요!
4. 품성의 탁월성이 감정과 행위 선택에 있어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있도록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왜 올바른 목표를 욕구하는 건가요? 자연적인 성향을 이겨내고 중용에 따라서 선택하려는 것이 결국 올바른 목표를 욕구하려는 힘이어서 그런가요?
그럼 중용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품성의 탁월성을 기르기 위해 덕 있는 행위를 반복학습 하여 습관화해야하고 중용의 선택을 더 잘하기 위해 실천적 지혜 즉 교육이 필요한거죠?
5. 이황과 주희의 도심인심이 같고 이이는 다르다고 하셨는데 주희랑 이이의 도심인심설이 잘 구분이 안됩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각대상이 리 도의 성명을 지각할때 도심이 된고
마음의 지각대상이 형기에서 비롯하는 사사로운 욕구를 지각할때 인심이 됩니다
이이는 마음의 의욕작용이 도의 성명을 위해 발할때 도심이 되고
마음의 의욕작용이 구체 식색과 같은 형기에서 비롯하는 사사로운 욕망일때 인심이 됩니다
지각대상과 의욕작용의 대상의 차이로 밖에 생각이 안되는데... 지각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결국에 리를 근원으로 할지 기를 근원으로 할지에 대한 것인가요..???
그럼 의욕작용은 근원은 리와 기의 근원 없이 마음 하나 인건가요?
6. 칠정은 인심과 도심의 선악을 합하여 말한 것이라고 했는데 도심에는 악이 없는거 아닌가요?
도심과 칠정의 선악을 말하는 것일까요...?
7. 교재 p.527 첫번째 지문에 셋째는 용을 평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결국에 용을 평상시에 해야할 것으로 여긴다는거 아닌가요?? 용이란건 선을 지속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 의지인데 이것을 왜 평상시에 해야할것으로 여기는게 왜 오늘날 성인이 되고자 해도 그럴 수 없는 이유인건가요?
8. 정약용의 관점에서 주자의 신독과 정약용의 신독과 다른 점은
주자의 신독은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말로 이것은 다른 일과 타인과 아무도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모를꺼야라는 마음이 될 수 있으므로 적절히 실행될 수 없지만
정약용의 신독은 홀로 있을때 삼가는 것은 항상 상제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까지 감시하므로 인식하기에 자기 반성에 더욱더 효과적이라는 것인가요...? 둘의 차이점 잘 이해가 안되요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