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실존주의, 아우구스티누스 질문입니다.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0년 04월 29일 12시 04분
- 조회수
-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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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키르케고르
1. 심미적인 것에 종속된 사유의 가능성이란 심미적 실존과 관련된 가능성입니다. 심미적 실존은 사유를 통해 자신의 욕구를 무한히 팽창시켜 나가며, 그런 식으로 사유를 통해 팽창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심미적 실존은 사유를 통해 자신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향락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심미적 실존의 사유의 가능성은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지적인 것에 종속된 사유의 가능성이란 지적인 사유 활동을 통해 우리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상상해 보는 것과 관련된 가능성입니다. 이 또한 상상된 가능성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입니다.
2. 원문의 ‘종합’은 자유의 무한성과 개인의 유한성의 종합입니다.
3. 원문의 ‘타자’는 신을 지시하는 용어입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신은 관계를 정립한 주체이자 왜곡된 관계를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켜주는 주체, 즉 관계의 양극의 올바른 종합을 이루어내는 주체입니다.
4. 원문의 ‘보편적인 것’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 확립된 보편 도덕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성적 사유를 통해 확립된 보편적 진리를 일컫습니다.
5. 비약은 불가능합니다. ‘실존의 3단계 중에서 모든 사람이 이 세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단계를 거쳐 종교적 실존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특정 단계에 고착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6. 네.
하이데거
1. 죽음과 불안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두 개념의 정의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현존재의 본질이라 일컬어지는 실존은 항구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해 나가는 자유로운 가능성을 지닌 존재자라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아구구스티누스
덕이란 우리의 의지를 사랑의 위계 질서에 따라 향유할 것을 향유하고 사용할 것을 사용하도록 이끄는 내적인 힘 혹은 능력입니다. 이러한 덕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사랑의 질서를 올바르게 바라 보고, 그에 따라 향유할 것과 사용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즉, 덕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선한 의지를 소유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성의 시선은 진리를 향하게 됩니다.
▒▒▒▒▒▒ [강효경 회원님의 글] ▒▒▒▒▒▒
강의 들었을 땐, 분명히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헷갈리는 것들이 많네요ㅠㅠ 그래서 질문을 한꺼번에 올립니다..!
실존주의에 대하여 질문하고자 합니다..!
키르케고르 질문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원문에 대한 질문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유독 원문이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것 같아요ㅠ
1)
p.285 첫 번째 원문에서 사유의 가능성이 전혀 이해가 안갑니다. 사유의 가능성은 사유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 아닌가요? 왜 여기서는 불안과 구분되어야 하고, 또 심미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인데 왜 비현실적이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갑니다...
2)
p.285 두 번째 원문에서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이 현상이 나타나는 때는 정신이 종합을 하러할 때" -> 이는 정신이 무제한적으로 나오는 자유와 미래에 대한 무지를 종합하려 할 때를 말하는 것인가요?
3)
p.287 첫 번째 원문, 절망이라는 균열관계는 자기 관계에서의 분열인데 왜 타자에 의해서 정립된 관계안에서의 잘못된 관계라고 표현하였는 지 이해가 안갑니다.
4)
역설에 관한 질문입니다. p.293페이지 마지막 원문에 "이제 보편적인 것을 통하여 단독자로서 보편적인 것의 상위에 있는 단독자가 된다고 하는 역설" 이 부분에서 보편적인 것을 통한다 했는데 이 것이 "신"이 맞나요?
5)
실존의 3단계 중에서 모든 사람이 이 세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심미적 실존에서 바로 비약적으로 종교적 실존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6)
본래적 실존 회복 방식에서 절망 후에 "정열적인 결의"와 불안의 극복 방법으로 제시한 "모험"은 다른 것 맞나요? 즉, 모험은 딱 신앙을 가지고 살겠다는 결단만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 질문입니다.
1)
죽음은 근원적인 불안인가요? 죽음은 불안의 한 종류가 맞나요?
2)
p. 299 원문에서 "그때마다 이 존재자로서 가능한 방법이고 또한 이것 뿐이다."
이는 현존재의 명백한 성격은 고유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존재라는 물음을 던질때만 규정된다는 것이 맞나요?
아구구스티누스 질문입니다.
지복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타락한의지-신의 은총-최고덕 소유-선한의지소유-우월한 이성-지복" 이렇게 답글이 달린 교수님 답변을 보았는데,
우리가 최고덕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질서"에 대해 알고 그것을 향유하고 사용하므로써 덕을 갖추게 되잖아요. 사랑의 질서는 도덕법칙이 규정한 것으로 덕의 원리라 되는 것인데, 왜 최고덕 소유가 더 앞에 오는지 이해가 안갑니다ㅜㅜㅜ
사랑의 질서를 우리가 미리 알아야 최고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가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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