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실존주의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0년 08월 22일 14시 36분
- 조회수
-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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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으로 답변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칸트
칸트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면 의문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유란 현상계의 기계론적 인과법칙을 초월하여 실천 이성을 통해 도덕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도덕법칙에 따라 자신을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지계에 속하는 인간은 그 자체 초월적 자유입니다.
의지의 자율이란 실천 이성에 의해 수립된 도덕법칙만을 자기의 규정 근거로 삼는 의지의 성격입니다. 요컨대 의지가 실천 이성에 의해 수립된 도덕법칙만을 자신의 규정 근거로 삼아 그것을 지향할 때, 그러한 의지를 자율적인 의지라 하는 것입니다.
야스퍼스
1. 이전 답변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이 답변을 보시고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다시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간의 사귐에서 필연적으로 ‘실존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 즉 사랑하는 타인과도 생존을 위한 폭력적 투쟁을 배제하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상황입니다. 이러한 한계상황은 나 자신과 타인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계기가 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큰 절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야스퍼스는 참된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실존적 투쟁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이나 투쟁이 없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램은 실존과의 참된 사귐을 방해하고, 궁극적으로 참된 실존의 회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2.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과의 사귐과 초월자의 사귐은 실존 회복을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스퍼스의 실존은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실존과의 사귐 속에서 실존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르트르
절망과 불안은 그 질이 완전히 다른 기분 혹은 감정입니다. 절망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드러나는 기분 혹은 감정입니다.
맑스셸러
가치를 인식하는 지향적 활동은 의지의 활동이 아니라 지향적 감정 그 자체가 지닌 지향적 감정의 내적 활동입니다. 참고로 ‘의도적’이라는 용어와 ‘의지적’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보면, 이성 작용을 포함한 모든 의식적 활동이 의지적 활동이라는 불합리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이데거
실존은 미리 정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미래로 기투하는 존재, 즉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 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실존은 가능성입니다.
▒▒▒▒▒▒ [김병찬 회원님의 글] ▒▒▒▒▒▒
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한계상황 앞에서의 좌절이란 자신의 힘으로 한계상황을 넘어설 수 없다는 자각에서 오는 좌절입니다. 그러므로 현존재를 위한 폭력적 투쟁에서 발생하는 좌절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타자와의 폭력적 투쟁은 어떠한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자각에서 발생하는 좌절입니다.
2.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간의 사귐에서 필연적으로 ‘실존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 즉 사랑하는 타인과도 생존을 위한 폭력적 투쟁을 배제하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상황입니다. 이러한 한계상황은 나 자신과 타인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계기가 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큰 절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야스퍼스는 참된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실존적 투쟁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이나 투쟁이 없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램은 실존과의 참된 사귐을 방해하고, 궁극적으로 참된 실존의 회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3. 키르케고르는 종교성 A의 대표자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듭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 신적인 것, 즉 영원불변하는 진리가 존재하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파악함으로써 절대적인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에 영원불변하는 진리가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는 관점에 근거해 있는 것이 종교성 A입니다.
4.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와 도구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계를 주위세계라 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러한 주위세계에서 현존재의 일차적인 삶의 방식은 수공업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즉, 주어진 목표 달성을 위해 도구를 가지고 작업을 수행하는 수공업자의 삶의 방식이 주위세계에서의 현존재의 근본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이처럼 현존재가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세계를 작업세계라 합니다. 이러한 작업세계는 주위세계와 별도로 구분되는 세계가 아니라 주위세계에서의 현존재의 실존 방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 [노유리 회원님의 글] ▒▒▒▒▒▒
한계 상황은 모든 것이 무화되는 순간이며 자신의 초월을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여기서의 초월자의 만남을 통해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 투쟁의 한계상황에서 현존재를 위한 폭력적 투쟁은 현존재가 자신의 물질적 욕망과 필요를 추구하다보면 타인의 것을 빼앗기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무한한 욕구로 인해 모든 것을 얻고 싶으나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인가요?
2. 실존을 위한 사랑의 투쟁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해 자각하고 싶은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삶에 대해 자각하고 싶은 타인과의 협동, 실존과의 사귐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서로와의 만남을 통해 너와 나의 서로 다른 각자성과 주체성을 알게 되면서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대중적인 부분이 좌절되는 것인가요?
3. 키르케고르의 종교성 A에서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영원한 것의 발견이라고 했는데 내재해 있는 영원한 것이 도데체 무엇인가요?
4. 하이데거의 작업세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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