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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내용질문

[7~8월 강의질문]  질문입니다

작성자
김병찬
등록일
2020년 08월 22일 14시 36분
조회수
378
첨부파일
개인 사정으로 답변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칸트 칸트의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면 의문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유란 현상계의 기계론적 인과법칙을 초월하여 실천 이성을 통해 도덕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도덕법칙에 따라 자신을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지계에 속하는 인간은 그 자체 초월적 자유입니다. 의지의 자율이란 실천 이성에 의해 수립된 도덕법칙만을 자기의 규정 근거로 삼는 의지의 성격입니다. 요컨대 의지가 실천 이성에 의해 수립된 도덕법칙만을 자신의 규정 근거로 삼아 그것을 지향할 때, 그러한 의지를 자율적인 의지라 하는 것입니다. 야스퍼스 1. 이전 답변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이 답변을 보시고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다시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간의 사귐에서 필연적으로 ‘실존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 즉 사랑하는 타인과도 생존을 위한 폭력적 투쟁을 배제하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상황입니다. 이러한 한계상황은 나 자신과 타인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계기가 되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큰 절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야스퍼스는 참된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실존적 투쟁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이나 투쟁이 없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램은 실존과의 참된 사귐을 방해하고, 궁극적으로 참된 실존의 회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2. 야스퍼스에 의하면, 실존과의 사귐과 초월자의 사귐은 실존 회복을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스퍼스의 실존은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다른 실존과의 사귐 속에서 실존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르트르 절망과 불안은 그 질이 완전히 다른 기분 혹은 감정입니다. 절망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드러나는 기분 혹은 감정입니다. 맑스셸러 가치를 인식하는 지향적 활동은 의지의 활동이 아니라 지향적 감정 그 자체가 지닌 지향적 감정의 내적 활동입니다. 참고로 ‘의도적’이라는 용어와 ‘의지적’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같은 것으로 보면, 이성 작용을 포함한 모든 의식적 활동이 의지적 활동이라는 불합리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이데거 실존은 미리 정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미래로 기투하는 존재, 즉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 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실존은 가능성입니다. ▒▒▒▒▒▒ [강효경 회원님의 글] ▒▒▒▒▒▒ 교수님 아래에 질문을 했는데 일부 답변이 누락되어 다시올립니다..! 칸트 이성과 의지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도덕법칙을 입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천이성이 도덕법칙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인간이 의지의 자율, 즉,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한건가요? 아니면 실천이성은 의지의 자율과 상관없이 도덕법칙을 만들었고 "실천이성이 만든 도덕법칙을 나의 의지의 준칙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실천이성이 도덕법칙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의지의 영역과 관계없이 실천이성은 도덕법칙을 만들지만, 그것을 우리의 의지의 준칙으로 수립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칸트는 이성 먼저, 의지 그 후에 이런식으로 고려한게 아니라 이성과 의지는 동시상호적인 것을 이해해야하나요? 야스퍼스 답변도 1) 실존의 위한 사랑의 투쟁에서 ‘투쟁’은 자타가 참된 실존을 발견하기 위해 벌이는 협동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용어입니다. 찾기 위해 벌이는 이렇게만 답변이 올라와 있고 뒤에가 잘렸습니다ㅜㅜ 협동적상황이 참된 실존을 발견하는 상황인데 왜 한계상황이 되는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다른 답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좌절이라고 하셨는데, 투쟁=협동적상황이라면 왜 좌절하게 되는건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투쟁해야한다는 것의 투쟁은 폭력적 투쟁을 뜻하는걸까요?! 결론적으로 실존을 위한 사랑의 투쟁은 현존재의 사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가 한계상황인걸까요? 2) 실존은 초월자와의 사귐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데, 실존은 다른 실존과의 사귐을 속에서만 실존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갑니다. 실존의 실현은 초월자와의 사귐을 통해서 실현되는데 그 것 역시 다른 실존과의 사귐이라는 상황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건가요? 사르트르 추가 질문입니다. 불안과 절망을 구분해야 하나요? 불안은 인간이 무한히 자유롭고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니어 자신이 자유임을 회피할 수 없을 때 불안을 느끼고, 이러한 불안이 다시 절대적 자유라는 명백한 인식으로 결합하면 절망을 느낀다는데 둘이 똑같은 말 같아서요! 불안은 기분이고, 절망은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 나눠서 구분을 해야하는지 헷갈립니다 맑스셸러 감정의 지향적인 작용은 감정상태로부터 가치를 느끼는 의도적인 활동이고, 감정작용과 의지작용은 구분되는 것이라고 알고있는데, 의도적인 활동 자체가 의지적인 작용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감정은 느끼는 것이고 의지는 추구하는 것으로 다르지만, 감정의 지향적 작용은 가치를 의도적으로 느낀다는 것에서 의지와 어떻게 구분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 "본래적 실존 가능성"의 정확한 의미가 궁금합니다.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정의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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