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칸트의 수단화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0년 10월 20일 21시 58분
- 조회수
-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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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자료 잘 보았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내주신 자료 작성자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였습니다. 인간성의 정식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수단으로만 대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한다면 수단으로 대우해도 된다.’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결코(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은 인간성의 정식을 통해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이 논지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단으로 대우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칸트에 의하면, 어떤 존재를 수단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것을 나의 경향성에서 비롯되는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그것을 그 자체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나의 필요와 욕구와 관련한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가치(도구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대우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나의 경향성에서 비롯되는 단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가치(도구적 가치)만을 지닌 대상을 칸트는 물건이라 명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인간성’이란 ‘도덕적 자율성’을 일컫는 용어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 절대적 가치를 지니며,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목적이 되는 인간, 그래서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마땅한 인간은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존재를 ‘물건’과 대비하여 인격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라’는 말이 됩니다.(‘자율’의 의미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한낱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주장의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장은 당연히 ‘자율적이고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한낱 수단으로(수단으로만) 대우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을 함축합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수단으로 대우해도 된다’는 주장을 인간성의 정식이 함축하고 있느냐입니다. 위에서 수단으로 대우한다는 말과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한 칸트의 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에 의거할 경우, ‘목적으로 대우한다면 수단으로 대우해도 된다’는 말은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을 그 자체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인격으로 대우한다면, 그를 나의 경향성에 비롯되는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오직 도구적 가치만을 지닌 수단 혹은 물건으로 대우해도 된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는 불합리한 것으로서, 인간성의 정식을 통해 칸트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닙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각자 우리가 선택한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기능적이고 수단적인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공급자를 필요로 하고, 공급자 또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자를 필요로 합니다. 이처럼 현실에서 우리는 타인을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고, 타인 또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한된 재화와 능력을 소유한 인간은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칸트가 이러한 사태의 현실성과 불가피성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성의 정식을 통해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와 같은 관계가 도덕적으로 정당한 관계가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 조건이 바로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한낱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로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인간을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존중한다는 것이고, 존엄한 존재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소비자와 공급자가 서로를 자율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목적으로 대우하는 관계가 됩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율적으로 동의한 행위 원칙에 따른 개인들의 상호 관계는 타인을 한낱 수단으로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서로를 목적으로 대우하는 관계입니다. 어떤 형태의 기능적이고 수단적인 관계이든 간에, 그러한 관계가 인간성에 대한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둔 관계라면, 그것은 한낱 수단들의 관계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인격들의 관계이며, 목적으로서의 인간성에 대한 존중을 그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비인격적 수단 혹은 물건을 이용하듯 타인을 한낱 수단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발적으로 동의한 행위 원칙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타인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타인의 인격에서의 인간(성)을 한낱 수단으로 대우하지 않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는 관계입니다. 요컨대 이러한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한낱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한낱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관계이며, 인간성의 정식이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약 한국윤리학회의 주장, 즉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전제 하에서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것은 칸트에게서 허용 가능합니다.”라는 주장이 ‘서로를 목적으로 상호 존중하는 바탕에서 형성된 개인들 사이의 기능적이고 수단적 관계만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관계이다’라는 관점을 드러낸 것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주장이 인간은 수단임과 동시에 목적이라는 불합리한 관점에 근거하여 제시된 것이라면, 이는 칸트의 본의를 훼손하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 [김범준 회원님의 글] ▒▒▒▒▒▒
저는 여태 다른 생윤, 윤사 강사와 마찬가지로 학원 알바에서 칸트가 인간을 목적과 동시에 수단으로 대우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고 알고 가르쳐왔고, 심지어 레건 역시 같은 선상에서 동물을 목적과 동시에 수단으로 대우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https://cafe.naver.com/pollo11/7004)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 칸트의 체계를 무너진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외람될지 모르나 관련하여 꽤 설득력을 지닌 자료가 있어 첨부합니다. 칸트 원문은 물론 애링턴, 샌델, 테일러, 일본학자와 한국칸트학회, 한국윤리학회에서 그 근거를 찾은 글입니다. 인터넷 블로그 글이라 신빙성이 떨어져보일 수 있으나 블로그 주인이 출판한 책(문제집)의 내용을 작성한 것이며 그 근거도 직접인용된 것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ucuzz&logNo=22093077130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칸트 대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인정하면 어쩌면 칸트 체계를 흔들 수 있겠지요. 철학과 출신인 저로서도, 칸트가 만약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철학 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그 정당화 논변이 참 궁금합니다. 흥미로운 탐구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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