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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내용질문

[4~5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작성자
김나윤
등록일
2021년 06월 02일 13시 31분
조회수
176
첨부파일
안녕하세요 교수님! 인터넷으로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기출 강의도 병행해서 듣고 있는데요, 복습하면서 궁금한 것들이 생겨서 질문 올립니다. ㅇ 피아제, 비고츠키 1-1. 피아제 강제적 도덕성 단계에서, 아동들이 주관적 객관적 측면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과 규칙이 정신과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도덕적 실재론이 모순이 되지 않나 싶어 궁금합니다. 1-2. 이 질문은 사실 교과교육론 강의를 듣다가 생긴 의문입니다.. 같이 질문해도 될런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궁금한 부분은 비고츠키의 지식 부분입니다. 사회적 구성주의에서 지식의 성격을 보았을 때, '지식이란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과 집합적 조정에 의해 구성된 일련의 공유된 의미'라는 부분을 보고 저는 '아 지식은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드는 것이구나.'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있는 발달과 학습의 원리 부분에는 '아동들이 지식을 구성한다.'라고 서술되어 있어서, 이전 문장과 이 문장이 모순되지 않는가 싶어서 궁금합니다. 아동들은 학습을 하면서 '정신 기능'을 학습하는 것이지, '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ㅜㅜ ㅇ 스토아 2. 스토아가 이 우주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고 그것을 신 혹은 자연으로 명명한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자연이 모든 사물을 형성하는 원리가 된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전자는 (어떠한 원리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물을 의미하는 듯 하고, 후자는 (결과물을 만드는) 원리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결과물과 원리라는 두 개념이 어떻게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될 수 있는지,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궁금합니다. 3. 만물을 최상으로 배열하는 섭리인 자연법과 행복한 삶을 연관지었을 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스토아에게 있어서 행복한 삶은 자신의 본성인 이성에 따르는 삶인데, 제가 이해하기에 이것은 단순히 '행위'를 자연에 맞게 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 세상이 이성적인 원리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섭리인 자연법을 '인식'하고 그러한 세계를 평온한 세계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퀴나스와 비교했을 때, 아퀴나스는 자연법은 신에 의해 부여된 세계의 섭리이지만 인간은 '인간에 한정'하여 자연법을 파악하고 그의 '행위'만을 자연법에 따르게 하면 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스토아는 자연법을 세계의 섭리로 보지만, 이 세계의 섭리를 인식해야 하며, 행위도 자연법에 맞게, 인식 또한 전체의 섭리를 바라보며 그에 맞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ㅇ 에피쿠로스 4. 헬레니즘 기출 지문 2번의 원문의 해석이 궁금해 질문드립니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쾌락의 양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숙고를 통해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인생의 유한함도 우주의 무한함도 우리에게 똑같은 쾌락을 의미한다." 이 부분의 해석을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5. 헬레니즘 기출 지문 7번에 '에피쿠로스는 절제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을 알아내려 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는 쾌락과 고통 중 기피하고 선택할 것을 알아내는 것은 실천적 지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천적 지혜가 절제의 중요성을 알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보았을 때, 왜 절제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을 알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ㅇ 흄 6. 흄을 복습하면서 교재 p.166의 원문에 있는 '혐오 또는 선호가 어떤 대상을 향해 일어나는 것은 고통 또는 쾌락에 대한 전망 때문이다.'부분을 보고 기본서를 읽다가 해석이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서양윤리학사』 p. 367에 밑에서 14번째줄에 있는 부분인데요, '고통의 예상이 행위의 동기를 제공한다.'는 부분이 마치 '이성이 행위의 동기를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부분이 의아합니다. 경험과 경험으로부터의 추론을 통해 '만약 내가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으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정보를 알게 될 지라도, 즉 이성을 바탕으로 고통을 예상할지라도, 이러한 고통에 대하여 혐오의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이러한 고통의 예상이 행위의 동기로 작용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ㅜㅜ.. 단순히 '고통의 예상이 행위의 동기를 제공한다.'라고 보아도 되는 것인가요? 7. 교재 171페이지에 도덕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여타의 감정과 구별된다는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측면이 궁금한데요, 도덕감이란 것이 자부심과 수치심 그리고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이 아닌 것은 도덕감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대상은 도덕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있는 원문의 '우리와 전혀 무관할 때가 흔한 무생명체에서 발생하는 고통 및 쾌락'이라는 부분의 이해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무생명체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고통 및 쾌락이 자부심 수치심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아니라 '그저 고통 및 쾌락'일 뿐이기에 이는 도덕감과 구분된다는 것이라는 제 이해가 맞을까요? 그런데 무생명체가 발생하는 고통 및 쾌락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8. 원문을 보았을 때 "유용성은 도덕감의 원천"이고 "유용성은 정의의 근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유용성은 도덕적 시인과 부인의 감정을 갖게 하는 근원이 됨과 동시에 정의가 생긴 근원이 된다'라고 보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유용성과 도덕감 정의를 한꺼번에 생각했을 때 이 셋의 관계가 어렵습니다. 유용성을 바탕으로 도덕감이 생기기에 이 도덕감으로 정의를 시인했다, 즉 1유용성<- 도덕감 2도덕감=> 정의(ok)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ㅇ 주희 9. 마음과 리기의 관계에서 '마음은 기의 가장 순수하고 영명한 부분과 리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존재'라고 할 때, 이 '리'가 천리가 본연지성이 될 때 인간에게 들어가는 '성'과 동일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마음의' 원리로서의 '리'인가요? 즉, 저 리가 성인 것인지 혹은 마음의 의식 활동과 실천 활동의 원리가 되는 리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10. 위의 질문과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마음의 미발이 성이라는 것은, 마음의 사려가 발동하지 않아 리가 온전히 드러나는 상태인데, 마음의 리가 성이기 때문에 마음의 미발이 성이 되는 것일까요? ㅇ 키르케고르 11. 인간의 자기됨에서 소극적으로 관계하는 것과 대비되는 적극적으로 관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소극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무한성과 유한성 등의 양극 요소에 끌려다니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양극 요소의 고삐를 인간이 잡고 능동적으로 그 둘을 종합하려는 것으로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12. 실존이란 두 요소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능동적으로 자기를 생성시켜 나가는 주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능동적으로 자기를 생성'시킨다는 것을 '두 요소를 종합'하려 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혹은 이에 더해 즉 '두 요소를 종합하려 하는 것+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실존이 양극 요소의 종합체와 관계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는 전자 같은데 인간의 불안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후자 같습니다. 혹은 전자와 후자가 같은 것인데(즉 두 요소를 종합하려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 가능한 것인데) 제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요?ㅜㅜ 13. 불안의 제거 방법에서 왜 본래적 실존으로 정립할 때 불안이 제거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안은 무한한 자유와 이 자유로 인해 자신이 만든 가능성이 과연 실현될까라는 중압감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닌지요.. 본래적 실존은 양극 요소를 종합한 실존이고요. 본래적 실존으로 가면 자유와 중압감이 사라지는 것인가요?ㅜㅜ 14. 저는 절망을 양극 요소를 종합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고, 비본래적 실존인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은 이 양극 요소를 당연히 종합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이행 전 절망할 때는 각각 깨닫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심미 윤리 모두 무한성과 유한성, 영원성과 시간성, 자유와 필연성이라는 세 양극 요소를 모두 종합하지 못하지만 심미적 실존은 이 중 무한성과 유한성을 종합하지 못해 이 자각으로부터 절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윤리적 실존의 절망은 '양심을 바탕으로 완전한 도덕적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절망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 절망은 저 세 양극 요소 중 어떠한 것을 종합하지 못해 절망에 들어가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워서.. 질문드립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제 질문은 언제 끝날런지요..ㅜㅜ 질문하는 저도 힘든데 답변해주시느라 정말 고생하실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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