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1년 06월 15일 18시 15분
- 조회수
-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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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듀이는 선을 ‘보다 좋은 것’으로 정의합니다. 즉, ‘현재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악(현재 직면해 있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도덕적 문제)을 제거 혹은 개선하는 데 쓸모가 있는 것’이 선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행동(좁은 의미의 신체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활동을 포함하는 넒은 의미의 행동)을 통해 덜 좋은 상태에서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 달리 말해서 좋지 않은 상태를 제거 혹은 개선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그 반대가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듀이는 “지금까지는 선했을지라도 현재 타락하고 있는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지금까지는 대독적으로 무가치했을지라도 현재 선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2. 듀이에 의하면, 개인에게 실제로 중요한 것은 현재의 건강 상태를 개선하는 데 쓸모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의미를 지닌 건강의 개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도덕가가 해야 할 일은 현재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악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쓸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지, 모든 상황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영원불변하는 최고선 혹은 도덕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듀이의 관점에서 ‘건강’의 구체적인 의미는 개인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신체적, 정신적 상태와 관련하여 규정되는 것이고, 말씀하신 A+ 또한 주어진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해서만 그 의미가 확정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현실의 상황을 초월하여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건강’, ‘A+’ 개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3. 메킨타이어가 근대 계몽주의가 인간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을 거부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근대 계몽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 개념에 입각한 인간 이해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4. ‘따라서’는 오타입니다. 죄송합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종교적 실존은 신앙으로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신앙을 통해 신과 홀로 관계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기입니다. 달리 말해서 종교적 실존은 신앙의 힘을 통해 무한성과 유한성, 영원성과 시간성, 자유와 필연이라는 양극 요소를 종합하고, 그러한 종합체와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기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실존 단계에서 개인은 자유와 필연을 종합하게 됩니다. 이러한 종합을 통해 무한한 자유 혹은 무한한 가능성과 연관된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생겨나는 실존의 근원적 감정인 불안은 제거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실존은 무한한 자유 혹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해 불안해 하면서 유한성으로 회귀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현실로 실현하고자 결단하고 실천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신앙입니다.
5. 덕은 고유한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고 있는 상태 혹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이므로, 이성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고 있는 상태 혹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인간의 덕입니다. 그런데 이성이 자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한다는 것은 곧 이성이 파악하여 알려 주는 것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요컨대 이성의 탁월한 발휘는 이성의 명령에 대한 순응을 함축합니다. 그러므로 '덕 = 이성의 탁월한 발휘 = 이성에 순응하는 성향'이라고 공식은 아무런 문제 없이 성립 가능합니다.
▒▒▒▒▒▒ [김나윤 회원님의 글] ▒▒▒▒▒▒
안녕하세요, 교수님!
답변 감사합니다.
공부하다가 질문할 것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1. 듀이의 '도덕적 선'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문제 상황-> 창조적 지성-> 문제 해결 방법(지식)-> 문제 해결 방법이 옳은 방법인지에 대한 평가-> 문제 해결 방법이 옳은 방법이라는 가치 판단' 이 과정을 통해서 '문제 해결 방법'이 현재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악을 개선하는 데 쓸모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결론적으로 문제 해결 방법=선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보았을 때 도덕적 선이란 '악을 제거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성적 활동을 통해 발견되고 구성되는 문제 해결 방법'이라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올바른 선= 행위의 올바른 방향'으로 도덕적 선은 (그 상황 안에서 결론 지어진, 그래서 그 상황 안에서 고정되어 있는) 행위의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덕적 문제 상황이.. ~한 상황에서 약을 훔쳐야 하는가?라는 상황이라면, 이 상황에서의 도덕적 선은 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인 (예를 들어) '~한 상황에서는 약을 훔쳐야 한다.'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행동이라는 점에서는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는데요. 이러한 점에서 왜 '도덕적 선이란 행동을 통해 덜 좋은 상태에서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문장과 '도덕적 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은 행동을 통해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개량하고 진보해 나가는 과정이다.'라는 문장이 성립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덕적 선이란 '(과정을 의미하는 듯한)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도록 하는 '행동''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도덕적 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은 '행동을 통해' 도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라, '창조적 지성을 통해 올바른 행동을 파악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아닌지요..? 더불어서 '좋은 사람이란 점점 더 선해지기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 문제 상황에서 올바른 문제 해결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ㅠㅠ...
2. 교재 344페이지의 '정적인 성과나 결과가 아니라 성장, 개량, 진보 과정이 중요해진다. 두 번 다시 변하지 않는 고정된 목적으로서의 건강이 아니라, 필요한 건강의 증진-이라는 계속적인 과정-이 목적이자 선이다.'라는 부분의 해석이 어렵습니다. 듀이가 목적은 문제 상황마다 변하는 것이고, 문제 상황은 다양하기 때문에, 정해진 목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만.. 정해진 목적의 예시로 '정적인 성과나 결과, 건강'을 드니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적인 성과나 결과, 예를 들어서 A+을 맞아야 한다는 정적인 성과나 결과를 성취하더라도 그 수준을 넘어서도록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앞의 문장을 말한 것일까요? 그런데 건강은 건강하면 끝이 아닌가요..ㅜㅜ 건강 부분에서 건강을 넘어서는 목적이 있을까요..?
3. 덕 교육론에서 근대 계몽주의의 인간관을 비판하는 부분에 '인간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을 거부한다'라는 것이 있는데요. 사르트르와 칸트 기출 문제를 풀 적에, 사르트르와 달리 칸트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성으로 본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성으로 본다는 것은 즉 인간의 목적이 인간성의 실현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근대 계몽주의가 인간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을 거부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놓친 부분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4. 저번 주에 제가 질문했던 것 중 13번이 "불안의 제거 방법에서 왜 본래적 실존으로 정립할 때 불안이 제거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안은 무한한 자유와 이 자유로 인해 자신이 만든 가능성이 과연 실현될까라는 중압감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닌지요.. 본래적 실존은 양극 요소를 종합한 실존이고요. 본래적 실존으로 가면 자유와 중압감이 사라지는 것인가요?"였는데요, 이에 대한 교수님의 대답이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본래적 실존 혹은 종교적 실존의 신앙은 미래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을 제거하고, 행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현실로 생성하는 힘입니다. 따라서" 이셨습니다. 본래적 실존이 된다면 내가 자유로이 선택한 것으로 인해 생겨난 가능성이 모두 해결되는 것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 인한 중압감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따라서 이후가 너무 궁금해 재질문드립니다.
5. 마지막 질문입니다. 스토아 이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덕을 기능의 탁월한 발휘와 관련하여 이야기하는데요. 스토아는 왜 덕을 '이성의 탁월한 발휘'에서 나아가 '이성에 순응하는 성향'이라고 정의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시 말해서 덕이 왜 '인간의 기능, 즉 이성의 탁월한 발휘'에 그치지 않고, '덕= 이성에 순응하는 성향'이라고 보는지 궁금합니다! 스토아에게 있어 '이성의 탁월한 발휘= 이성에 순응하는 것'인 걸까요?
저번 주에 많이 질문드렸는데 상세히 대답해주셔서 궁금증이 모두 풀렸습니다. 항상 정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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