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 작성자
- 김나윤
- 등록일
- 2021년 07월 26일 11시 39분
- 조회수
- 176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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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교수님!
문제 풀의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문제 풀의 강의를 들으며 복습하다보니, 궁금한 것들이 생겨서 질문을 찾아보는데요.
제 질문들도 여럿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읽으면서 시간이 참 빠름을 다시 느낍니다 ^^
주자는 공부를 해도 항상 궁금한 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생겨 게시판을 찾았습니다.
주희의 '마음의 기질을 바로잡는 것'에 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전에 교수님이 질의응답을 해주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 주희에게 있어서 공부의 목적은 ‘마음의 기질에서 오는 사욕의 제거’가 아니라, ‘천리의 실현을 방해하는 마음의 기질적 제약의 극복’입니다. 주희에게 있어서 마음의 기질은 본심이 지닌 신령한 사유 능력과 그것에 근거한 행위 능력의 실현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따라서 기질의 제약을 극복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기질로 인해 본심의 능력이 발현되지 않을 경우, 기질의 병폐를 고쳐 본심의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달리 말해서 본심을 보존함으로써 천리의 온전한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 다음부터는 제가 정리한 내용입니다. 마음은 리와 기의 병합이고, 이때의 리는 본연지성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기는 리의 원리를 실현시켜줄 마음을 이루는 재료입니다. 그러므로 기의 기질에 따라 리의 실현 정도가 결정되는데요. 리가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양하여 기의 기질적 제약을 극복하여 기가 청수해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희는 기의 기질을 바로 잡는 공부를 공부의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1. '기의 기질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마음을 이루는' '기의 기질'을 바로잡아서, '마음을 이루는' '리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 책에는 '마음의 기질을 바로 잡는 공부는 마음의 사욕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질 자체에서 사욕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요..? 기질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사욕을 극복하는 것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이 모호한 점 죄송합니다.
2. 도심에 의한 인심의 규제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주희는 마음의 지각 대상에 따라 도심과 인심을 나누는 듯 한데요. 즉, 도의를 지각하는 마음: 도심, 형기에서 기인하는 사욕을 지각하는 마음: 인심인 듯 합니다. 그러면 주희의 입장에서는 마음의 지각은 한 순간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이이는 마음이 발한 목적에 따라 인심 도심을 구분하기에 한 순간에 하나만 있을 수 있다는 인심도심종시설을 주장하는데 주희는 이와 달리 두 개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각각 있는 도심이 인심을 규제할 수 있는 것일까요?
3-1. 1번과 연관되면서도 다른 질문인 것 같습니다. 주희에게 있어서 불선이 일어나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교수님 주희 학습포인트 순서를 참고했습니다.) '1마음의 기질을 바로잡지 못해 리가 온전히 발휘되지 않는 경우 2도심에 의해 인심이 규제되지 않아 인심이 인욕으로 흐른 경우 3마음이 사욕에 의해 가려지게 되어 부중부화에 빠진 경우(=심주성정의 측면에서 마음이 기질에서 비롯되는 부적절한 욕구를 따라서 마음이 주재성을 잃어 성정을 주재하지 못해 불선이 생기는 경우)' 이 세 가지는 같은 것인가요, 다른 것인가요? 마음의 기질을 바로잡지 못해 리가 온전히 발휘되지 않으면 마음의 지각이 밝지 못해 도심이 있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인심이 규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까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 1상황= 2상황 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3상황은 다른 것 같은데요, '마음의 기질의 병폐로 인해 리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와 '마음이 기질에서 비롯되는 부적절한 욕구를 따라서 마음이 주재성을 잃은 경우'가 같은 것인가요?
3-2. '마음이 기질에서 비롯되는 부적절한 욕구를 따라서 마음이 주재성을 잃은 경우'에서 이때 '기질에서 비롯되는 부적절한 욕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주희의 입장에서 기질은 몸과 마음을 이루는 기질을 통합한다고 교수님이 답변주신 글을 읽었는데요, 그러면 몸과 마음을 통합한 모든 기질에서 비롯되는 부적절한 욕구를 마음이 따른다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때 마음은 본래 영명한 것인데, 어찌 기질에서 비롯되는 부적절한 욕구를 따르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이 (사람마다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있는) 기질의 청탁수박의 차이에 따라 가리어져 있어서, 기질에서 비롯되는 욕구를 따르게 되고, 그러면 주재성을 잃는 것인가요? 그런데 만약 이 경우라면, 태어날 때부터의 기질이 좋지 못해 리가 가려지면 그 자체로 불선이 생기는 것으로 설명이 충분한 것이 아닌가요? 나아가서 기질이 좋지 못해 부적절한 욕구를 마음이 따라 불선이 생긴다는 경우를 상정해야 하는 것인가요..? 주희는 불선이 생기는 경우를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인가요? (기질이 좋지 못해 리가 가려지는 경우, 이에 나아가서 가려진 마음으로 부적절한 욕구를 따르는 경우)
4. '마음이 성정을 주재한다는 것: 미발의 때에 마음이 성을 온전히 보존하고, 이발의 때에 성을 중절의 정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조금만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해서 미발시 성을 온전히 보존하고, 이발시 성을 중절의 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요?
5. 거경하면 자연스레 미발함양하고 이발성찰하게 되며 이는 중화를 실현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교재에 서술되어 있는데요, 미발함양=중 실현은 이해가 되지만, 이발성찰은 '이발의 때에 드러나는 성의 단예를 살펴 마음이 악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이것이 어찌 화 실현과 같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화가 되는 것은 마치 이발 전에 마음이 심연 깊이 있는 성을..? 표면으로 살살 들어올려서..? 중절한 감정이 발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요. 이발성찰은 이발 이후에 성의 단예를 살펴서(성의 단예가 감정인지요?) 그것이 옳지 않으면 없애고 옳으면 보존하고 그런 것이 아닌가요...? 이것이 어찌 화의 실현과 같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즉, '저는 미발(前), 미발->이발의 과정(中), 이발(後)'의 세 단계가 있으면, 경은 미발(前)과 이발(後)에 관여하는 것이며(미발시 성 보존 이발시 성의 단예 살펴서 올바르게), 중화의 화는 미발->이발의 과정(中)에서 마음이 작동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제 생각이 틀린 것일까요?)
6. 거경 공부는 본래의 마음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공부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거경을 통해 마음의 주재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점 같은데요. '본래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 마음의 주재성을 잃지 않는 것'인가요? 즉, 본래의 마음을 유지하면 마음의 주재성이 온전히 발휘되는 것인가요? 마음의 기능이 주재인가요..?
7. 마지막 질문은 이이입니다. 이통기국에서 만물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의 관계, 개체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의 관계를 이끌어내는 논리에서 질문이 있습니다. 이이의 본체론은 제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리통+기국-> 유행지리 생성. 그래서 저는 개체의 본성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가 되었으나, 여기에서 본연지리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즉, 만물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가 같을 때, 즉 본연의 이가 보편적인 것이어서 만물에 두루 통할 때, 분명 이 통하는 리가 기에 의해 국한되어 개체의 본성이 되는 것일텐데, 그러면 본연지리는 개체에게 어찌 있는 것인지요..? 본연지리와 유행지리라는 것이 동시공존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오랜만에 질문하러 왔는데, 또 질문이 산더미인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ㅠㅠ
성리학이 이해가 된 듯 싶다가도, 다시 보면 또 궁금한 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답변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교수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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