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1년 08월 03일 20시 37분
- 조회수
-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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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도덕 원칙, 즉 올바른 행위의 준칙과 덕은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입니다.
2, 3. 의는 일종의 사유 작용입니다. 사유 작용은 언제나 작용의 대상을 갖습니다. 일종의 사유 작용인 의 또한 대상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의 관계에서 부모를 어떻게 모실까 생각하는 것은 의입니다. 부모 혹은 부모의 관계는 의의 지향적 대상인 물 혹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곳이 물’이라는 말은 곧 뜻이라는 사유 작용이 관계하는 대상이 물이라는 말입니다. 의가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이 관계하는 대상이 바르지 않게 됩니다. 다시 예를 들면 의가 바르지 않으면 그것의 대상이 부모와의 관계라 올바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물 혹은 일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의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의가 바르게 되면 그것이 관계하는 물 또한 바르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물은 올바른 이치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격물입니다. 격물은 ‘물을 바로 잡는다 혹은 물을 바르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물은 일이고, 일은 의념이 있는 곳의 일이므로, 결국 격물은 의념이 있는 곳의 일(예를 들어 부모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념이 있는 곳의 일이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의념이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의 바름과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의념의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격물은 의념을 바르게 하여 일을 바르게 하는 공부하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4. 왕수인에 의하면, 마음은 천리이자 양지로,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작용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양지에 따라 작용할 수도 있고, 사심물욕에 따라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념에 선악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양지에 따라 작용하지 않고 사심물욕에 따라 작용하면, 양지의 판단은 가려지게 됩니다.(마치 내가 당면한 도덕적 문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지만, 사욕 때문에 비도덕적인 선택을 하고 행위하듯이.), 양지의 판단이 가려진다는 것은 곧 의념의 판단자이자 안내자로서의 양지의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불선한 행위는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따라서 양지가 그 본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에서 사심물욕을 제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왕수인에게 있어서 마음의 사심물욕을 제거하여 양지의 온전함을 실현하는 것, 요컨대 존천리거인욕이 수양의 최대 목표가 됩니다. 이것이 곧 치양지입니다.
5. 양지의 작용을 방해하는 사심물욕의 제거하는 노력이 곧 양지가 알려주는 것을 힘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 [김나윤 회원님의 글] ▒▒▒▒▒▒
안녕하세요 교수님!
즐거운 여름 휴가 잘 보내고 있으신지요?
복습하면서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1. 왕수인에게 있어 마음=천리이고, 이 천리는 도덕 원칙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덕'에 대한 왕수인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드립니다. 마음이 천리이고 이 천리가 도덕 원칙의 총체라면, '사덕은 양지에 내재한다.'로 사덕과 양지(마음의 본체)의 관계 설명은 충분한 것이 아닌가요? 왜 '사덕은 양지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지 않고, '사덕은 마음의 표덕'이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2. 왕수인의 '뜻이 있는 곳이 사물이다.'라는 명제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힘듭니다. "뜻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일은 하나의 사물이다."라는 문장에서 '뜻: 부모를 섬기는 것'과 '사물: 부모를 섬기는 일'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뜻=사물'로 이해하면 안 될까요? 뜻과 사물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3. 2번이 이해가 안 되어 이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왕수인에게 있어 '격물'은 '그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명성리학 p. 382에 이것을 도출해내는 논리가 다음과 같은데요,, -> 그는 '사물'을 '뜻이 있는 곳'으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격물'이란 뜻이 있는 곳을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뜻이 있는 곳'은 실제 사물일 수도 있고, 그저 의념 속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격물이란 실제 사물을 바로잡는 것인가 아니면 의념 행위 자체를 바로잡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격물은 그 사건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것인가 아니면 그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것인가? <- 이 부분과 함께 교수님의 강의를 되새겨보았을 때, 격물은 '마음의 악한 의념을 바로잡아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물=뜻이 있는 곳'인데, '격물'은 '뜻이 있는 곳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의념을 바로잡는 것'이 되는 것일까요..? 대체 어떤 논리로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의념'이 되어야 이러한 논리가 도출되는 것 같은데 왕수인은 '물'과 '의념'을 구분하고 있지 않나요?ㅠㅠ 혹은 물은 의념의 단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인가요..? 그래서 물에는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없고,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념뿐이어서 의념을 바로잡으면 물이 바로잡힌다고 보는 것인가요..? 하지만 만약 이렇다면 왜 '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4. 왕수인의 입장에서 불선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양지는 의념의 판단자이자 지도자이며 양지는 가려지더라도 발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양지는 항상 발하며, 양지가 발하면 의념을 판단하며, 의념을 판단한다면 동시에 양지가 의념을 선한 방향으로 지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양지의 정의에 따라서요, 양지는 또한 양능이기도 하기 때문에요). 그런데 왕수인은 양지가 사욕에 가리어지면 불선이 나오는 것처럼 이야기하니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제가 생각해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상황: 양지가 사욕에 가려져 마음의 본연의 상태를 잃은 마음-> 혼탁한 마음에서 의념이 발함(가선가악)-> 양지가 의념의 선악을 판단함-> 양지가 의념을 선한 곳으로 이끎' 두 번째 의념이 발한 곳에서 불선이 생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양지의 특성상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양지가 의념을 선한 곳으로 이끌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욕에 마음의 본연성이 가려지면 양지가 주재성을 잃는 것인가요?
5. 4번과 연관되는 질문입니다. 교수님 교재 pp. 504-506에서 치양지를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1) 양지에 사욕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지극함에 이르는 것 2) 양지가 알려주는 도덕 원칙을 실천으로 관철시켜 나가는 것/ 그리고 이 둘을 종합하여 교수님이 종합하신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치양지란 양지의 작용을 방해하는 사심물욕의 장애를 제거하여 양지가 판별하고 결정한 것을 힘써 실천함으로써 양지의 지극함을 실현하는 공부<-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치양지의 2) 의미에서 '도덕 원칙을 실천으로 관철시켜 나가는 것'은 치양지의 의미 1)인 '양지에 사욕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지극함에 이르는 것'을 실현한다면 자동으로 되어지는 것인지, 혹은 1)의 과정을 거친 후 도덕 원칙을 실천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의지적인 노력'을 반드시 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즉, '양지에 사욕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지극함에 이르면 반드시 실천이 담보되는 것인지', '양지에 사욕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지극함에 이르더라도, 실천하기 위해서는 실천의 과정에서 양지가 작용할 때 끼어드는 사욕을 없애거나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의지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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