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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내용질문

[1~2월 강의질문]  아리스토텔레스

작성자
김병찬
등록일
2022년 01월 16일 09시 36분
조회수
940
첨부파일
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2.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행복이 품성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약 행복이 품성상태라면 평생 잠만 자면서 식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크나큰 비운을 겪고 있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한 생각이며,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행복을 일종의 활동으로 규정해야 한다면, 또 만약 활동들 중 일부가 다른 것을 위해 선택되는 필수적인 것이고, 다른 일부는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것이라면, 행복은 분명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로 놓여야 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활동들의 하나로 놓여서는 안 된다. 행복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조적이기 때문이다. 활동은 그것으로부터 활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추구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가 바로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고귀하고 신실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할만한 것들 중 하나이니까.” 이 구절에 의하면, 행복은 ‘탁월성’이 아니라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엄밀한 의미의 덕복일치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덕복일치란 덕과 행복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탁월성이 아니라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덕은 기능 수행과 관련한 탁월성이기 때문에, 덕은 언제나 활동하는 덕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덕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복일치를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탁월성이 아니라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탁월성이 활동으로 구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요인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탁월성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에 따르는 활동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탁월성을 갖추어야만 하고, 또한 활동을 방해하는 외적인 요인이 없어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탁월성과 함께 그것에 따르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외적인 것을 소유해야 우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덕의 소유는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3. 영리함은 의견을 산출하는 정신의 능력이지 탁월성이 아닙니다. ▒▒▒▒▒▒ [강지원 회원님의 글] ▒▒▒▒▒▒ 1.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행복을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나요? 덕(탁월성)은 품성상태이고, 행복은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라서 덕과 행복은 카테고리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래 지문을 보면 덕과 행복이 동일시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행복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요, 이러한 선(善)들 중 최고의 선이다. 따라서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이며, 모든 행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행복인지를 알려면 인간의 기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만이 지닌 특별한 기능은 정신의 이성적 활동 능력이다. 인간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은 바로 이성적 활동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어떠한 활동이 잘 수행되는것은 그것에 알맞은 덕을 가지고 수행될 때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덕과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수정 인용- (윤사 미래엔 111p) (만약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과 행복의 관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요? 3. 아리스토텔레스는 의견을 갖는 영혼의 부분에는 영리함과 실천적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김병찬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서는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부분의 탁월성에 기예와 실천적 지혜가 들어간다고 되어 있어서 헷갈립니다... 첨부한 파일과 같이 정리를 해 보았는데 이게 맞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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