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아리스토텔레스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2년 07월 12일 20시 57분
- 조회수
- 447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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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탁월성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완전하고 자족적인 활동만이 행복이라 불릴 수 있고, 오직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만이 그러한 활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란 철학적 지혜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입니다. 여기서 철학적 지혜의 소유와 관조적 활동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탁월성의 정의에 따르면, 그것이 어떤 탁월성이든지 간에 탁월성은 활동입니다. 달리 말해서 활동하지 않는 탁월성이란 정의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철학적 지혜의 소유는 곧 관조적 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 결론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복일치를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탁월성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주장했을까요? 그것은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을 방해하는 요인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방해 요인으로 인해 탁월성을 소유하고는 있으나 그것에 따라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정의상 탁월성이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탁월성이 아니라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라고 강조한 이유가 주장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으로 규정될 수 있는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은 그러한 방해 요인이 없는 혹은 거의 없는 활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적 지혜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이 바로 그러한 활동입니다. 철학적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 그것에 따라 활동할 때, 그 활동을 방해하는 요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간인 한에서 최소한의 외적인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활동보다도 철학적 지혜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은 완전하고 자족적입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철학적 지혜에 따른 관조적 활동이 완전하고 자족적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입장은 덕복일치설에 해당한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철학적 지혜에 따른 관조적 활동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행해지기 위해서는 철학적 지혜의 소유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외적으로 좋은 것들 심지어 행운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달리 말해서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한 삶은 철학적 지혜의 소유와 더불어 외적으로 좋은 것들도 갖추고 있는 삶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입장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덕복일치설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현재 저는 후자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 [박민선 회원님의 글] ▒▒▒▒▒▒
아리스토텔레스 덕복일치에 대해 궁금한점이 생겼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덕일치는 반대했으나, 행복을 철학적 지혜에 따른 관조적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덕복일치를 주장한다고 하셨습니다. (2018년 송*정님 답변글을 보면)
그런데 교재 51p 각주1번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 명예, 탁월성(덕), 부 등은 행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나와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고선을 행복으로 보았는데, 탁월성(덕)이 행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덕복일치라고 할 수 없지 않나요? 각주1번을 보면 최고션=행복=탁월성(덕)이 성립이 안되는 것 같아 궁금해서 질문남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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