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뒤로

강의내용질문

[1~2월 강의질문]  질문 드립니다.

작성자
김병찬
등록일
2023년 06월 25일 19시 27분
조회수
429
첨부파일
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합리적 선택에 어긋난다는 말은 자신이 내린 합리적으로 숙고하여 내린 올바른 판단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그 반대의 행동을 욕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숙고적 욕구에 어긋난다고 하면, 자제력 없는 사람은 합리적 선택과 더불어 그러한 선택에 따른 행동에 대한 욕구와 정반대되는 선택과 욕구를 가지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에 어긋난다고 해야지 숙고적 욕구에 어긋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체계에서 ‘옳음’은 ‘좋음(선)’에 의해 그 의미가 규정됩니다. 따라서 선한 것은 곧 옳은 것이고, 좋은 목적은 곧 옳은 목적입니다. 3. ‘중용의 덕’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지 않는 용어입니다. 중용은 모든 개별적인 품성의 탁월성들의 공통 본질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품성의 탁월성은 본질적으로 중용의 덕이라고 한다면 부적절한 표현이라 볼 수 없겠습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끄러워할 줄 앎(=수치)’와 ‘의분’을 그 자체 탁월성이 아니라 어떤 조건 하에서만 훌륭한 것이 되는 감정으로 봅니다. ㅇ에피쿠로스 5. 적어도 에피쿠로스를 포함한 모든 행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성취해야 할 최고 목적은 곧 인간의 최고선입니다. ㅇ스토아학파 6. 스토아학파의 이성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개념을 차용한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이성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세계 이성인데, 이는 온 우주의 영원한 생성의 법칙이자 우주 만물을 근거짓는 원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이성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세계 이성에 의해 주어진 인간의 본성으로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세계 이성, 즉 온 우주의 영원한 생성의 법칙이자 우주 만물을 근거짓는 원리을 이해하는 인식 이성 혹은 지성입니다. 7. 아리스토텔레스 관련 질문에서 말씀드렸듯이, 옳음은 목적으로서의 좋음에 의해 그 의미가 규정됩니다. 따라서 선한 의지는 곧 옳은 의지이고, 옳은 의지는 선한 의지입니다. ㅇ아우구스티누스 8. 사랑이라는 개념과 소유하는 개념은 결코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신의 은총을 매개로 하여 사랑과 소유는 필연적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 달리 말해서 상호 함축한다는 것(사랑은 필연적으로 소유를 함축하고, 소유는 필연적으로 사랑을 함축한다는 것)이 지난 답변의 요지였습니다. 9.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예정설에 의하면, 현세대들 중 어떤 이들은 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단,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완전한 향주삼덕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향주삼덕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서는 훈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현세는 그러한 훈련의 장소이고, 내세는 신과 기독교적 성인 안에서 향주삼덕을 완전히 성취하고 지복을 누리는 장소입니다. ▒▒▒▒▒▒ [이주연 회원님의 글] ▒▒▒▒▒▒ 안녕하세요! 공부하다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 올립니다! ㅇ아리스토텔레스 합리적 선택에 관한 여러 답변을 보고 정리해 보았는데,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1, 2번) 1. 숙고적 욕구는 행위의 동기가 되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하여 합리적 선택과 숙고적 욕구를 다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합리적 숙고=목적에 대한 욕구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행위의 선택, 숙고적 욕구=선택한 것을 욕구하여 행위의 동기가 되는 합리적 선택 으로요. 그러다 보니 ’자제력 없는 사람은 합리적 선택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말에서 자제력 없는 사람이 합리적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합리적 선택에 어긋난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합리적 선택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숙고적 욕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데 원문이라 제가 틀린 것 같아 질문 드립니다. 2. 합리적 선택은 목적에 대한 욕구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행위의 선택인데 여기서 목적은 좋음(선)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신실한) 합리적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교재 70페이지 다섯째 참고하였습니다) 1) 합리적 선택이 관계하는 목적은 좋은 것이어야 하고 2)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성적 숙고는 참이어야 하고 3) 숙고하여 나온 결과를 욕구해야 함 에서 1번의 좋은 것이 옳은 것이어야 하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3. 중용=감정과 행위가 상황에 따라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알맞은 ‘상태‘이기 때문에 중용의 덕이라는 단어는 품성적 덕을 가리키는 단어인지 궁금합니다. 4. 교재 59페이지의 품성의 탁월성과 악덕의 목록 표에서 ‘탁월성이 아닌 감정’이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 ㅇ에피쿠로스 5. 교재 104페이지 (1)인간의 최고선 : 쾌락 부분을 공부하다가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최고 목적=최고선이 같은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같은 의미라면, 이는 에피쿠로스 뿐 아니라 모든 서양사상가들에게 공통적인지 궁금합니다. ㅇ스토아학파 6. 세계 이성=모든 사물을 형성하고 만드는 원리, 필연적 인과법칙이고 이것이 모든 존재의 본성을 구성한다고 하셨는데요, 이 때 인간의 본성인 이성에서 원리로서의 세계이성과 사유하는 능력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7. 좋음=선, good 옳음=도덕적으로 마땅함 이라고 이해했는데요, 스토아의 진정한 자유 부분에서 올바른 의지=선한 의지라고 하여 선에 대한 개념이 헷갈립니다.ㅠㅠ ㅇ아우구스티누스 8. 덕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답변 중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답변 개념적으로 보면 ‘사랑’과 ‘소유’는 동일 개념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서 전자는 후자의 실현을 위한 조건이기는 하나 둘 사이의 필연적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의 소유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 것이 신의 은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 의하면, 신이 인간에게 최고덕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는 행위, 달리 말해서 신과의 인격적 만남을 허용하는 행위입니다. 이로 인해 최고덕에 따라 활동하는 것과 신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신이라는 최고선을 향유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됩니다. 요컨대 최고덕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와 신의 소유하고 있는 상태는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질문 신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의 소유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고, 필연적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 것이 신의 은총이라고 쓰여있는데 신에대한 완전한 사랑 즉 최고의 덕 자체가 신의 은총의 산물이므로 신의 은총을 이미 받았으므로 필연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되어 질문드립니다.. 9. 너무 기독교적인 질문인 것 같긴 한데 너무 궁금하여..ㅠㅠ질문드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세에서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신의 은총은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내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죽은 후에야 신의 심판을 통해 신의 은총을 받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가요? 질문이 너무 많네요ㅠㅠ 항상 공부에 많은 도움 받고 있습니다!! 매번 친절한 답변 감사드려요!!:D

본문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