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키르케고르, 흄 질문 드립니다.
- 작성자
- 고하늘
- 등록일
- 2024년 02월 11일 16시 02분
- 조회수
-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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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교수님 ! 늘 유의미한 수업 감사합니다. 공부 중 질문이 생겨 남깁니다 !
①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며 절대적인 기준은 인식 주체인 각 개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판단이 아닌 자기 사회의 관습에 따르고 복종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 주체와 절대적인 기준이 각 개인이라는 주장에 상충하는 것이 아닌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사회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사회의 관습과 개인의 판단이 상충되는 상황에서 사회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 아닌가?
② 공리주의
시즈윅에 따르면 지각적 직관주의와 독단적 직관주의, 철학적 직관주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적 직관주의를 행위공리주의로 독단적 직관주의를 규칙공리주의로 봐도 무방한 것인가?
또한 시즈윅은 공리주의를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옳은 행위는 그 행위에 의해 그들의 행복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을 고려하여 전체적으로 최대량의 행복을 산출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만 보면 벤담과 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③ 아우구스티누스
교재 124p에 보면 ‘따라서 두 국가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타락에 맞서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를 지녔고 신의 은총 없이는 천상의 국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두 국가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④ 아퀴나스
교재 P133 두 번째 원문 ‘우리의 행복은 ~ 종교적 덕이라고 불린다.’ 가 아퀴나스의 원문인데 해당 원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겠다. P134의 원문 또한 같은 의미로 의문이 생긴다. 두 원문에서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를 구별할만한 단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⑤ 키르케고르
보충자료 P2에 ‘인간은 신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진 종합과 관계 맺음을 통해 참된 자기가 된다. 인간은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참된 자기가 된다.’고 표현되어 있고 보충자료 P3에는 ‘절망을 알지 못하는 절망은 자신이 참된 자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절망이다.’고 표현되어 있다. P2에 따르면 참된 자기는 신과의 관계를 통한 후천적인 것으로 해석되고 P3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 되어서 의문이 생긴다.
⑥ 흄
교재 177p의 두 원문이 흄의 원문인지를 판단할 단서가 무엇일까? 홉스의 만인의 투쟁 상태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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