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월 강의질문] 이이 , 실용주의,지눌 질문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4년 08월 19일 22시 27분
- 조회수
-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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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1. 이이의 주장에 의하면, 인심은 주기라 해도 되고, 도심은 주기라 해도 됩니다.
2. 이와 기의 관계에서 발하는 것은 기고 발하는 근거는 이입니다. 인심과 도심은 모두 이와 기가 혼융하여 생겨난 것으로, 마음이 구체를 위해 발하였는가 혹은 성명을 위해 발하였는가로 구분되지만, 마음의 작용의 근거 혹은 근원은 모두 이입니다. ‘인심은 리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말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실용주의의 방법은 특정한 결과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태도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에서 ‘특정한 결과’란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 혹은 결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무관하고 우리의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목적을 의미합니다.
4. 교(敎)는 불교 경전 공부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지관 혹은 정혜의 수행은 그 자체로는 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태종의 선법인 지관은 언제나 교와 함께 하는 선법입니다. 그리고 지눌의 정혜쌍수 또한 언제나 화엄교학과 더불어 행해지는 선법입니다. 그래서 교선일치의 방법으로 의천은 천태선법인 지관을 강조한 것이고, 선교일치의 방법으로 지눌은 정혜쌍수를 강조한 것입니다.
▒▒▒▒▒▒ [전성원 회원님의 글] ▒▒▒▒▒▒
교수님 항상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 남깁니다!
1. 이이 원문을 보면 ‘인심과 도심에는 주리니 주기니 하는 말을 붙일 수 있지만,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5기출지문에 ‘ 인심은 리에 근본을 두고 있지만 구체를 위해 발한 것이므로 형기에 속함’이라는 문장과 ‘도심은 비록 기를 떠나 있지는 않으나 도의를 위해 발한 것이므로 성명에 속함’이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인심에 주기, 도심에 주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15기출 지문의 제시한 2가지 문장을 보고 인심에 주리, 도심에 주기를 붙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떤 것이 맞을까요? (즉 인심과 도심 각각에 주리, 주기를 어떻게 연결짓나요?)
2. 같은 맥락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이는 인심 도심 둘 다 ‘기발리승’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황이 15기출 지문처럼 ‘인심은 리에 근본을 두고 있지만 구체를 위해 발한 것이므로 형기에 속한다’고 하거나 ‘인심의 근원은 비록 하늘이 부여한 본성에서 나왔지만’ 처럼 말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발출구조는 인심과 도심 모두 기발인데 근원은 또 리(하늘이 부여한 본성)인 걸까요?
3. 제임스 실용주의 원문에서, ‘이상 말한 바에 비추어 볼 때, 실용주의의 방법은 특정한 결과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태도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즉, 최초의 것, 원리, ‘카테고리’, 어떤 필연성 같은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마지막 것, 결실, 결과, 사실로 눈을 돌리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의 앞 문장과 뒷 문장이 다소 상충되게 느껴져 질문드립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임스는 실용주의가 마지막 것, 결과를 중시하는 하나의 철학적 태도라고 보는데, 그렇다면 ‘실용주의의 방법은 특정한 결과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태도를 말하는 것 뿐’이라는 문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4. 게시판 답글을 찾아보니까, 의천 교관겸수에서 교(이론적 측면)는 불교이론 공부고/ 관(실천 수행 측면)은 천태종의 선법인 지(선정)와 관(혜)을 의미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질문에 대한 게시판 답을 보면 “지관에 대해 중국 천태종은 둘이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보아 지관병중을 주장합니다. 원효는 일심이문의 원융이라는 관점에서 지관이행을 주장하며, 선종은 지와 관, 즉 정과 혜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마음의 체와 용으로 간주하여 정과 혜를 구분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닦는 수행법에 반대합니다. 이러한 세 입장 중 그 어떠한 것도 지를 선종의 선 수행에, 관을 교종의 교학 공부에 분속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관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실천 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관을 교선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지관은 둘 다 실천공부의 측면이고, 이걸 교선통합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근데 선정(정)이랑 지혜 (혜)는 각각 순서대로 지, 관이랑 같은 건데 지눌의 정혜쌍수를 이야기할 때는 왜 선교통합을 이야기하나요!? 저는 어쨌든 지관은 둘 다 실천수행법이고 지관을 같이 닦는거라면 교종과 선종의 통합으로 보면 안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무엇이 맞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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