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의질문] 질문드립니다
- 작성자
- 김병찬
- 등록일
- 2025년 04월 07일 20시 02분
- 조회수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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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왕수인
1. ‘즐거움(樂)’은 심체의 본래적 상태를 지시하는 개념입니다. 심체의 본래적 상태란 평정하여 성가심이 없는 마음의 편안한 상태입니다. 참고로 원문을 보면 ‘기쁘다’는 것을 ‘본체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
2. 키르케고르가 절망의 종류로 제시한 모든 것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즉, 그것들은 모두 절망을 계기로 참된 자기 자신은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의 절망입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이러한 종류의 절망에서 벗어나 절망을 계기로 하여 참된 자기 자신을 선택할 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참된 자기가 될 수 있습니다.
3. 절망의 종류들 사이에 말씀하신 것과 같은 필연적인 순서는 없습니다. 단, 절망을 알지 못하면 참된 자기 혹은 본래적 실존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절망을 알아야 그것을 계기로 참된 자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4. 절망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내면의 양심이고, 내면의 양심을 자각한 심미적 실존이 그것을 통해 윤리적 삶을 선택하면 윤리적 실존이 됩니다. 반대로 내면의 양심을 무시하고 심미적 실존 단계에 계속 머물 것을 선택한다면 심미적 실존으로 존속하게 됩니다.
5. 보충자료에 있는 내용대로 기술하셔도 되고, 신 앞에 선 단독자의 함의만을 서술하셔도 됩니다.
5-1. 실존 과제는 참된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양극 요소를 종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합은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은 절망하게 됩니다. 참된 자기는 그러한 절망을 계기로 하여 보다 참된 자기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이데거
6. 틀린 점이 없습니다.
6-1. 질문에 사용하신 ‘본래적 실존으로서 느끼는 불안’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래적 실존을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이
7. 주희에 공부 체계에 따르면, 도문학은 궁리를 의미하고, 존덕성은 거경을 의미합니다. 이이는 또한 동일한 입장을 취합니다.
역행은 이이만이 강조한 것이 아니라, 주희의 또한 역행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희는 중용에서 제시된 도문학과 존덕성이라는 공부 체계에 따라 공부 체계를 크게 궁리와 거경으로 구분한 반면, 이이는 교기질의 중요성을 매우 크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역행을 공부 체계에 공식적으로 포함하였습니다.
이황, 이이
8. 이황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이이의 비판은 454~455쪽의 내용을 참고하여 서술하시면 됩니다.
이이에 의하면, 도심과 인심은 모두 기발이승이라는 구조 하에서 발한 마음(작용한 마음)을 지시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발하였다고 할 때, 발한 주체는 기입니다. 반면에 이황은 도심은 마음의 이가 발한 마음이고, 인심은 마음의 기가 발한 마음이라 주장합니다.
야스퍼스
9. 네.
9-1, 2. 참된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암호 해독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초월자의 언어(암호)를 듣고, 그것을 초월자와의 관계 하에서 자기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암호 해석이라 합니다. 달리 말해서 암호 해석이란 암호들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해석하고,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참된 실존이 됩니다.
▒▒▒▒▒▒ [이정빈 회원님의 글] ▒▒▒▒▒▒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복습 중 궁금한 점들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왕수인
1. 교재 467p에서 '즐거움이란 슬픔에 반대되는 감정인 기쁨의 감정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뒷 페이지 원문에는 <즐거움이 마음의 본체이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천지 만물과 일체여서 기쁘고 화창하니 원래 간격이 없다. ‘늘 때에 맞게 익히는 것'은 이 마음의 본체를 회복하기 위해서이고 '기쁘다'는 것은 본체가 점차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벗이 찾아온다'는 것은 본체의 기쁘고 화창한 기상이 천지 만물에 두루 미쳐서 간극이 없다는 것이다. 본체의 기쁘고 화창한 기상은 본래 이와 같아서 애초에 더할 것이 없다.>라고 적혀 있어서 기쁨의 감정인 것처럼 느껴져서 헷갈립니다. 원문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요?
키르케고르
2.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의식 여부를 기준으로 절망을 알지 못하는 절망, 절망을 아는 절망(절망을 알고 있으나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절망)으로 분류하였는데요. 여기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절망(강함의 절망)은 본래적 실존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부정적인 상태인가요? 허구적 자기를 강화하고 매달린다는 것은 참된 자기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되면 심미적 실존 단계에서 절망을 선택하여 참된 자기를 회복하고자 하는 상태는 어떠한 절망 유형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인가요?
3. 키르케고르에서 비본래적 실존은 절망을 자각하든, 자각하지 않든 반드시 절망하는 존재이므로
- 자신의 유한성, 필연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가능성에만 매달리는 상태: 절망을 알지 못하는 절망 상태
- 유한성을 자각하고 유한성과 무한한 욕망 사이에서 절망을 느끼고, 극복하기 위해 더 큰 쾌락을 추구하려는 상태, 참된 자기 자신이 아님을 자각하고 절망을 선택하여 윤리적 삶을 선택하는 것: 절망을 아는 절망
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래서 절망을 알지 못하는 절망에서 절망을 아는 절망으로 나아가고, 그로부터 보다 본래적 실존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맞나요?
4. 심미적 실존에서 절망과 양심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절망을 알지 못하는 절망 상태에서 절망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양심인지, 혹은 이미 절망을 아는 절망 상태에서 자신을 반추하고, 심미적 실존에 머물지, 윤리적 실존 단계로 나아갈지 선택하는 데 있어서 기능하는 것이 양심인가요? 아니면 이 모든 과정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양심인지 궁금합니다.
5. 학포 답안 작성 관련하여 질문드립니다.
"참된 자기(본래적 실존)의 성격을 ‘신 앞에 선 단독자’의 의미를 활용하여 서술하시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았는데요.
ㄱ. 인간은 양극 요소를 종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존 과제 앞에서 절망하고, 그러한 절망을 돌파하기 위해 심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비약적 결단을 감행한다. 종국에는 진앙의 힘으로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참된 자기, 본래적 실존이다.
ㄴ. 인간은 대립하는 양극 요소의 종합으로서의 인간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확립하고자 할 때,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깨닫고, 신 앞에 서기를 결단하여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체적 결단을 내리는 참된 자기, 본래적 실존이 된다.
ㄱ번은 보충자료에 있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작성하였는데 해당 문항에서는 심미적 실존부터 언급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서 ㄴ번과 같이 작성해보았습니다.
ㄱ, ㄴ 중 답변이 적절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고, 혹시 모범답안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5-1. 그리고 인간이 마주하는 실존 과제는 1) 대립하는 양극 요소를 종합하는 것과 2) 양극 요소의 종합으로서의 인간에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말하는 것 맞나요?
하이데거
6. 비본래적 실존과 불안, 죽음의 관계에 관해 질문 드립니다.
(본래적 실존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한 존재가 비본래적 실존인데, 이때 일상인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을 회복시키는 출발점이 '불안'이다.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일상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평균성을 기반으로 드러난 세계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 공공성의 편안함, 즉 일상인의 삶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는 영원할 수 없고, 그 이유는 가장 확실하고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불안은 현존재의 고유한 실존가능성을 드러내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고지하며, 현존재는 이를 깨닫고 불안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위의 내용은 비본래적 실존과 불안, 죽음에 대해 간단하게 작성해본 것인데요. 알맞은 것인지 한 번 확인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5-1. 그리고 저는 불안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본래적 실존으로서 느끼는 불안-불안으로부터 도피로 인해 일상인으로 삶-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의 불안 느낌-본래적 실존을 회복시키는 출발점으로서의 불안을 느낌-죽음의 가능성에서 고유한 실존가능성을 드러내야 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임-불안에서 도피하지 않음>
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요?
즉 본래적 실존으로서 느끼는 불안과 죽음의 불안이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 것인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이
7. 주희에게 있어서 도문학: 지 공부 / 존덕성: 경을 바탕으로 한 넓은 의미에서의 행 공부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이에서는 특히 역행이라는 실천적 방법을 드러내는데, 그에 따라 존덕성과 도문학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지 궁금합니다. 교재 461p 밑부분의 원문에서 <'존덕성'은 거경이고, ‘박학어문'은 궁리이며 '약지이례'는 역행이다.>이라고 나오는데요. 그렇다면 이이 입장에서 도문학이 궁리(격물치지), 즉 지 공부를 가리키는 것은 주희와 동일하지만, 존덕성은 거경으로 한정되고, 역행은 더이상 존덕성에 속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7-1. 이이에게 있어서 역행을 주장한 것이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이 존덕성과 도문학을 근거로 거경과 궁리를 중심으로 한 수양방법을 강조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라고 교재에 적혀 있는데, 주희에서도 성의정심수신과 같은 행 공부가 나타나는 것 같은데, 역행이라는 행 공부가 지닌 특별성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황, 이이
8. 이이 학포 중 <‘도심(道心) 이발(理發)’, ‘인심(人心) 기발(氣發)’ 주장에 대한 이이의 비판을 서술하시오>에 대해 저는
<도심은 성명, 도의를 목적으로 하여 마음이 작용한 것이고, 인심은 형기, 기질에서 기인하는 사사로운 욕망을 목적으로 하여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도심과 인심이 드러나는 것을 이가 발한 것, 기가 발한 것으로 나눌 수 없다.> 라고 작성하였는데요. 마음이 작용한 것 - 마음이 발한 것 - 기가 발한 것 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위와 같이 작성하였는데, 마음이 '작용'하는 것과 마음이 '발한' 것을 위의 내용처럼 혼용하여 써도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8-1. 7번 질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할 때, 이이에서는 마음의 작용(마음이 발하는 것) = 기의 작용(기가 발하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황에서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면 성발(이발)도 되고, 기발도 되는 것인가요?
8-2. 제가 작성한 것처럼 <'도심은 ~ 마음이 작용한 것이고, 인심은 ~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라고 하면 이이에서는 기발이라는 말이기는 하지만,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은 다른 학자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답변 내에서 마음의 작용을 기가 작용한 것, 기발, 혹은 기발이승이라고 정확히 명시해야만 하는 것인지, 혹은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라고만 적어도 문제가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야스퍼스
9. 좌절하면 무조건 비약하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한계상황을 받아들여야 비약하는 것이 맞는 거겠죠?
9-1. 좌절과 절망 속에서 드러나는 초월자의 암호를 만나면 바로 비약하는 것인지, 혹은 암호를 해독해야 비약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9-2. 9-1번의 질문이 암호를 해독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서 생기는 질문인 것 같은데, 암호를 해독한다는 것이 한계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라고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요?
질문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 죄송합니다. 복습하다보니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지나치게 꼬아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여 죄송하지만 혼자서는 해결이 잘 되지 않아서 교수님의 답변을 얻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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